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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전문가칼럼]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쉬켁의 어원에 관하여

  • 작성자 안완국
  • 등록일 2018.06.11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쉬켁의 어원에 관하여



(키르기스 터키마나스대학박사과정)

도시, 중에서도 수도의 의미는 단순히 인구밀도가 높은 행정도시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수도는 그 자체로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 의식의 성숙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국가 발전가능성의 지표로써도 그 역할을 한다.

키르기스공화국의 수도 비쉬켁 (Bishkek)은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는 아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조선시대를 기점으로 보면  6백년, 삼국시대를 기점으로 보면  2천년에 가까운 긴 역사를 가진 도시인 것에 비교하면 비쉬켁의 140년은 이제 막 태어난 신생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키르기스공화국의 수도 비쉬켁은 올해 140주년을 맞이했다. 이에 다양한 문화행사 기획 및 도시정비 사업으로 시민의식 고취와 지속가능형 도시로 발돋움하고자 꿈틀대고 있다. 대표적으로 키르기스정부와 비쉬켁시청이 협력하여 도로정비, 도시녹지화, 지능형스마트도시만들기, 대중교통의 다양화 등 다양한활동으로 비쉬켁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중가수들의 문화공연, “비쉬켁의 어제와 오늘사진전, 나무조각 전시회 등을 기획하며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친근한 도시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쉬켁의 중심광장 알라토에 위치한 건물에 비쉬켁시 140주년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달려있다.


중심광장 알라토에 위치한 국립박물관, 국기 그리고 마나스 키르기즈 민족 영웅 동상.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과는 달리 비쉬켁의 짧은 역사탓에 학계에서는 도시이름의 유래 및 도시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 이는 비단 키르기스공화국 수도로써 위상을 바로 세우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국민들에게 자국의 수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애국심을 제고시키는 중요한 의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키르기스-터키 마나스대학 소속 투르크학 전문가인 탈라이벡압디예브 (Taalaybek Abdiev)의 비쉬켁도시어원이라는 글을 통해 비쉬켁의 역사와 어원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고, 비쉬켁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통한 한국과의 협력발전 가능성을 도모해보고자 한다.




비쉬켁의 어제와 오늘 사진전 1956년 소련지배 당시 비쉬켁 시의회 분과위원회 건물로 사용됨 (). 현재의 비쉬켁 시청 건물 ()


탈라이벡압디예브 (Taalaybek Abdiev)

(키르기스 & 터키마나스대학투르크학과교수)

올해 2018년은 키르기스스탄수도 비쉬켁이 도시로 승급한지 140된 해이다. 1878 4 29일 러시아제국 시기 행정도시였던 토크목에서 당시 비쉬켁의 이름이었던 피쉬펙(Pishpek)”을 행정도시로 지정하면서 본격적인 도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날짜를 기준으로 1978, “피쉬펙(Pishpek) 프룬제(Frunze)”도시 100주년을기념하여 소련으로부터 노동의 붉은기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비쉬켁 도시의 이전 역사를 돌이켜보면, 1825년 코칸드칸국이 현재의 비쉬켁 지역에 피쉬펙(Pishpek) 이름의 요새를 지었고, 1862 11즈음 러시아제국의 지배하에 요새의 기능을 상실했다. 얼마 후 요새자리에는 시장이 생겼고 1868년에 피쉬펙(Pishpek)이름의 마을로 변하였다.

역사학자이자 기자인 알렉산드르투조브 (Aleksandr Tuzov) 2009 2 6일자의 베체르니비쉬켁(Vecherniy Bishkek)” 신문에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작성한 <훔친과거> 라는 제목의 사설을 기고하였다. 글에 따르면, 629년부터 645년까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탐방한 승려 쓔안쯔잔쑤이압 (Syuan Tszan Suyab)은 지금의 토크목 (비쉬켁인근도시) 지역에 위치한-베쉼(Ak-Beshim)’  마을의 서편에 알려지지 않은 도시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세시기 아랍의 한 역사학자가 츄이(Chuy) 근처의 (Jul)이라는 도시가 지금의 비쉬켁 동부터미널 근처에 위치했었다고 밝혀냈다. 덧붙여, 아랍역사학자들은 비쉬켁도시의 동남쪽에 위치한 카라즈가치(Kara-Jygach)’ 지역에 기독교인 마을 타르사켄트 (Tarsakent)’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기자들은 이러한 증거들을 기반으로의 문을 제기했었다. 그렇다면 비쉬켁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자료들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1878년을 비쉬켁의 탄생년도로 여기는 것인가? 의문점에 대한 답으로 저명한 고고학자인 고르야체바 (V. Goryacheva)는 비쉬켁의 1500년 역사는 실재한다는 점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역사적 자료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저자 본인 또한 이와 같은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며, 같은 맥락에서 비쉬켁의 어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피쉬펙(Pishpek) - 프룬제(Frunze) 비쉬켁(Bishkek) 으로 변해온 도시의 이름이 어떤 이유로 바뀌게 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오랜 숙제였다. 역사학자 사파랄리예프 (D. Saparaliev)는 이 논란은 지금의 비쉬켁이 도시라는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파랄리예프는 비쉬켁행복한 (Bishkek schastlivaya gora)’ 제목의 논문에서 도시의 첫 명칭은 비쉬켁이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증명하였다. 이 논문에 실린 주장을 바탕으로 비쉬켁의 어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우리는 수도의 이름을 크므즈 (마유주)’를 만드는 도구인 비쉬켁과 관련지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쉬켁을 크므즈를 발효 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망이 (Бишкек – это мутовка, с помощью которой взбалтывают кумыс)’로 외국인들의 비웃음을 샀다. 키르기스인들 또한 이를 못마땅해 했다. 이에 1970년 역사학자 사파랄리예프와 문학박사 샤르센백우메탈리예브 (Sharshenbek Umitaliev)는 비쉬켁의 어원이 도구에서 탄생했다는 주장에 반대의견을 내세웠다.

저명한 지명학자인 무르자예프 (E.M. Murzaev) 1963년 코이추바예프 (E. Koychubaev)의 주장을 인용해 피쉬펙 (Pishpek)의 ‘Pish’는 다섯, ‘Pek’은 높음을 뜻하는 개의 단어가 합쳐져 다섯개의 봉우리또는다섯개의 이라는 뜻을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질학자 우므르자코프 (S. Umurzakov)는 피쉬펙(Pishpek) 지명은 이란-소그드언어군의 단어 결합으로산의 끝자락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지질학자 에셴쿨로프 (T. Eshenkulov)는 비쉬켁은 하나의 을 의미하는 오이라트어 비쉬텍 (Bishtek)에서 나왔다는 투르크학자스트코프 (S. Sydykov)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또한 학자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아토쿠로프 (S.Attokurov), 보르비예프 (E. Borbiev)와 같은 일부역사학자 및 작가들 또한 비쉬켁의 어원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키르기스어의 다섯 (Besh)‘과 견고함 (Bek)‘을 의미하는 키르기스어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역사학자 사파랄리예프는 비쉬켁은 페르시아어의 , 앞부분을 뜻하는피쉬(Pish)’ 와 을 나타내는 쿠후(kuh)’라는 단어의 결합으로 행운의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상학자들의 주장은 역사적 또는 언어적 증거들이 불충분 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비쉬켁이라는 이름은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크므즈 만드는 도구로써의 비쉬켁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브슈-(Bysh-)’라는동사는오래전부터지금까지도같은의미로사용되고있는고대투르크어로, 투르크어군에속한다양한언어에서또한쉽게찾아볼있다. 고대투르크어사전을살펴보면, ‘브슈-(Bysh-)’ 동사는 1. 끓다, 삶다, 익다, 2. 구워지다, 3. 크므즈를만들다 (Древнетюркский словарь 1969)의미로쓰인다고나와있다. ‘브슈- (Bysh-)’ 동사에동명사어미‘-gak’ 연결시키면‘bysh + gak’되고, 후에‘bishkek’ 이라는단어가만들어졌다고보는것이타당하다고하겠다. , 도구를오래전부터사용해왔음은논란의여지가없어보인다. 그렇다면과연도구의이름을어떻게도시이름으로사용하게되었을까?

키르기스스탄이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 소련정부는 키르기스스탄으로 관리자를 파견했다. 소련관리자는 피쉬펙 (Pishpek: 지금의비쉬켁) 도시의 근처 [지금의카라-즈가치 (Kara-Jygachi), -자르 (Kok-Jary)]에 위치한 네스토리안들의 묘지에서 십자가 모양이 새겨진 매우 많은 양의 암석을 발견했다. 당시 해당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살아온 원주민들은 암석을 범상치 않게 여겨 한 장소에 모아놓았다고 한다. 네스토리안인 무덤은 가로 120 cm, 세로 60cm 규모였다. 동방학 언어학자이자 민속학자인 판투소프 (N.Pantusob)과 페티소프 (A.Fetisob) 80개가 넘는 무덤을 발굴했고, 611개의 십자가 모양이 새겨진 암석을 찾았다. 발굴결과 이 지역에 3천명 이상의 네스토리안인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십자가 모양이 새겨진 돌들은 예전부터 비쉬켁에 많이 발견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비쉬켁의 카라-즈가치지역은 12-14세기에 네스토리안인들이 살았던 타르사켄트 (Tarsakent)라는도시였다. 이 도시 이름은 투르크-몽골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던 시절 명명되었다.

오래 전부터 비쉬켁에서 살아온 키르기스인들은 네스토리안인들이 돌에 새긴 십자가 모양의 돌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비쉬켁이라는 단어가 십자가를 표현하는 단어일수도 있다는 가설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가설에 그칠뿐 투르크어 계열의 하나인 키르기스어에는 십자가를 표현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십자가라는 표현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있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투르크어의 하나인 터키어에 또한 십자가를 표현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며,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하치(hachi)’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비쉬켁이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십자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비쉬켁은 다른말로 유목민들의 전통 음료인 크므즈(말의)를 숙성시킬 때 짜내던 도구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키르기스조상들은 크므즈를 만들 때 사용하던 십자가 모양의 비쉬켁도구에 비쉬켁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용했던 것을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의 이름으로 변했다는 주장이더욱 일리있어 보인다.

물론 도시의 이름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코칸드칸국(18-19C)의 지배를 받기 이전부터 비쉬켁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키르기스 역사학자인 사파랄레프 (D.Saparalev)가 수집한 자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상 탈라이벡압디예브교수의 비쉬켁어원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았다. 비쉬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바탕이 될 때 서울과 비쉬켁이 상생 발전 할 수 있는 초석이 마련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는 변화와 발전을 없이 거듭해왔다. 이러한 서울의 역동성이 차례의 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국가로 손꼽히고 있는 키르기스공화국과 공감할 수 있는 면모가 아닐까 싶다.

키르기스공화국 수도 비쉬켁에 대한 깊은 이해는 앞으로 한국과 긴밀한 교류에 있어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는 양국 간의 우호증진과 무역증대 및 문화교류를 이끌어낼 것이며, 협력과 상생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데 중요한 단초로 작용할 것이다. 더불어 한국의 도시발전경험은 비쉬켁의 발전가능성 제고에 기여할 있는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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