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전문가 칼럼

[전문가칼럼] 약시 크즈 마할리듼 칙마이두(조신한 처녀는 마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여성억압인가 민족보전인가?

  • 작성자 송호림
  • 등록일 2018.05.11

약시 크즈 마할리듼 칙마이두
(조신한 처녀는 마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여성억압인가 민족보전인가?


위구르 역사문화 연구가 송호림(Alimjan)


올해 상반기 한국의 최대이슈는 아무래도 미투(MeToo)운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년 10월 미국 할리우드를 휩쓸었던 미투운동의 바람은 불과 3개월 만에 한국에 상륙해 어느 여검사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이어졌다. 이후 연예계는 물론 그간 움쩍도 않던 정치권까지 뒤흔들면서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제는 여성인권과 성평등을 강조하는 젠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모르면 상대로부터 교양이 없다고 지적받는 세상이다. 여성에 대한 한국 남성들의 시각이 근본부터 확연히 바뀌어가는 것이다. 동북아 3개국(한중일) 가운데 한국만큼 여성운동의 파급력이 큰 나라가 없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중앙아시아의 사정은 어떨까? 몇 년 전 어느 한국인 우즈벡 전문가가 겪었다는 에피소드 하나를 떠올려 본다. 직업훈련차 한국에 파견된 일련의 우즈벡 남성들이 자신들의 한국어 통역을 맡은 (미혼의) 동포 여성 두 명에게 그렇게 오래 한국에 살았으면 됐지, 왜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너희들을 길러준 고국에 봉사하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고선 다음의 유명한 속담 하나를 던졌다는 것이다. “약쉬 크스 마할라단 치크마이드!(yaxshi qiz mahalladan chiqmaydi)” 곧이 직역하면 좋은 여성(아가씨)은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인데, 글쓴이 자신도 현지 남성들로부터 같은 말을 수 없이 들었다면서 이러한 시선이 우즈벡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 남성들은 우즈벡이 아닌 한국에 있으므로 기껏해야 우물 안 개구리들에 불과하다는 일침을 날렸다. 다만 이 전문가가 현지에서 수년간 우즈벡어를 공부했고 한국에서는 공공기관에 통역도 나가는 터라 우즈벡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음에도, 그들이 어째서 그런 속담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여기서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즈벡에 그런 말이 있다면 위구르는 어떨까사실 나 또한 비슷한 광경을 위구르에서 수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1월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를 방문했을 때 카쉬가르 사람들에게 유사한 속담이 있는지를 넌지시 물었다.1)그러자 다들 위구르에도 역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이 있다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 아닌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한 노인은 그것은 종교격언이기 때문에 꾸란의 가르침에서 그 말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며 진지하게 어원까지 일러 주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달에는 속담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이슬람 색채가 강하기로 소문난 안디잔(Andijon)이 목적지였다. 이 때 나는 확인 차대여섯 사람에게 같은 속담을 위구르어로 물었다. “약시 크즈 마할리듼 칙마이두! 이 속담이 그쪽에도 있어요?” 그러자 우즈벡 사람들 역시 박장대소하며 대체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고 되묻고는 그런 전통속담이 틀림없이 있기는 있노라고 답해주었다. 하지만 그 어원은 이슬람이 아니라 같은 마을의 참한 여성을 뺏기고 싶지 않은 남성들이 만들어낸 속설(?)이라고 했다. 또 어떤 아주머니는 참한 여성이 있다면 안에서 결혼을 하지 왜 바깥으로 가겠느냐고 되물었다. 어찌됐든 같은 속담이 우즈벡과 위구르 모두에서 널리 통용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언젠가 한 위구르 친구로부터 들은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우즈벡과 위구르는 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쌍둥이야.”2)




<사진 1> 우즈베키스탄 안디잔주(Andijon viloyat) 파흐타바드구(paxtaobod tumani)에는 청()의 건륭제가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한 18세기 이후부터 박해를 피해 차차 이곳으로 이주해온 위구르 망명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략 만여 명 이상이 12곳의 마할라에 나뉘어 거주하고 있다. 사진은 파흐타바드에 위치한 위구르문화센터와 위구르중고생들의 사진. 송호림


사실 카쉬가르를 포함한 신장 서남부가 위구르에서도 유독 이슬람 색채가 짙은 점은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즈벡도 코칸드, 페르고나를 거쳐 안디잔에 이를수록 이슬람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 있다. 그래서 혹자는 약시 크즈 마할리듼 칙마이두라는 속담이 앞서 위구르 노인이 일러준 대로 이슬람이 자아낸 하나의 종교적 격언이 아닐까 추정할 것이다. 실제로 꾸란과 하디쓰에 유사한 뉘앙스를 풍기는 몇몇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3)그러므로 단지 한국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러한 정서는 시대착오적이고 불합리한 여성억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속담의 숨은 의미와 그 배경을 세세히 살펴보면, 이는 사방의 왕래가 자유로운 중앙아시아에서 민족 고유의 공동체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약시 크즈 마할리듼칙마이두


위구르에서는 이러한 전통속담을 마칼(maqal; 우즈벡어 maqol)이라 부르는데,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속담의 어원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위구르의 사회구조가 유목에서 정주형태로 변화할 즈음부터, 혹은 그들의 이슬람화가 시작된 이후부터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그렇다면 단어 하나하나씩 그 의미를 되짚어보자. 우선 약시 크즈라는 표현은 무슨 뜻일까? 투르키스탄 정주민 사회에서 좋고 나쁨을 평가할 때는 보통 약시(yaxshi)는 긍정을, 에스키(eski)는 부정의 의미를 갖는다.4)또한 크즈(qiz)는 결혼하기 이전의 젊거나 보다 어린 여성을 지칭한다. 결혼을 한 젊은 여성은 아얄(ayal) 혹은 주완(juwan)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다.5)그러므로 약시 크즈라는 표현은 결혼 적령기 혹은 그 이전의 조신한 여성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단어는 마할라(위구르어 mehelle; 우즈벡어 mahalla)이다. 마할라는 투르키스탄 오아시스 정주민 사회의 전통주거문화로서 위구르와 우즈벡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보통 거주세대는 스물에서 최대 백여 세대에 이르며 빵집(nawayxana), 소매점(dukan we magazin), 모스크 등 기본적인 주거편의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라는 속담6)도 있듯이, 마할라구성원들은 서로의 이름, 나이, 재산, 직업은 물론 몇 명의 자녀가 있는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이웃사촌이다. 이들은 서로의 집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마을의 경조사를 돌보는 한편, 각자가 맡은 역할에 따라 하나의 종족-민족으로서 가장 작은 세포단위를 이룬다.






<사진 2, 3> 카쉬가르 투만 강의 2007년 모습()2015년 모습(아래). 강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카쉬가르의 인기관광지인 잉바자(yéngi bazar)와 오른쪽으로는 불락베시(bulaq beshi) 마할라가 보이는데, 8년 사이 잉바자 방면의 강둑은 공원화가 완료되었고 불락베시 마할라는 3분의 1 이상이 철거되어 주차장으로 바뀌거나 잔여지역도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송호림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992년부터 마할라의 개념을 국가사회집단의 최소단위로 확장하면서 소련의 위성공화국이 아닌 우즈베키스탄 공화국(Oʻzbekiston Respublikasi)’으로의 고유한 민족공동체를 확립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무려 1만 개가 넘는 마할라가 존재하며 수십 대를 이어 내려와 그 기원을 가늠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반면 위구르에서는 1990년대 말까지 비교적 더디게 진행된 신장의 도시재개발이 21세기 들어 보다 가속화하면서 마할라는 사라지고 빈자리를 신식 주택지구인 샤오취(小区)가 메우고 있다. 그간 마할라공동체는 물밀듯 밀려오는 한족인구에 맞서 위구르 고유문화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해왔는데, 이것이 빠르게 해체됨에 따라 위구르족은 전례 없는 민족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7)




<사진 4> 위구르 마할라 향촌사회를 주제로 제작되어 2016년 신장텔레비전(Shinjang téléwiziye istansisi)에서 절찬리에 방영된 38부작 드라마 카쉬가르의 이야기(Qeshqerdiki Hikaye)’. 카쉬가르시 근교의 투그만 마할라에서 생기는 각종 에피소드를 담은 위구르판 전원일기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위구르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종영 이후 우리들의 마할라(Bizning Mehelle)’처럼 굴자식 만담(ghulja chaqchaqliri)과 마할라공동체를 소재로 한 시트콤도 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3인칭 부정형인 칙마이두에서 칙막(chiqmaq)이란 동사는 떠나다’ ‘벗어나다라는 뜻을 가졌으므로, 문장 전체를 풀어보면 (잠시 시장이나 친척 집에 다녀오는 것을 예외로) 미혼의 여성이 장기간 마할라를 떠나는 일은 공동체 내에서의 자기역할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관점은 분명 한국의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한국의 마을에는 결혼적령기의 남녀 대신 노인들만 가득하거니와, 해외 교환학생이나 자원봉사 경력이 없으면 이력서조차 쓰기 힘든 세상인데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온 미혼의 한국 여성은 모두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가?


하지만 한국식 사고만으로 투르키스탄 사회를 이해할 수는 없다. 각종 매스컴에서 중앙아시아를 ()실크로드라 부르면서 마치 엄청난 기회의 땅 마냥 벌써 주판을 튕기는 것처럼,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볼 뿐이다. 시퍼런 칼을 든 채로 피범벅이 된 군인들과 그 뒤에 낭자한 시체더미의 실크로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살육과 약탈, 강간이 매일처럼 자행되던 잔혹한 민족분쟁의 역사가 중앙아시아 현지에서는 거의 입에 오르지도 않는 이팍 욜리(yipek yoli; 위구르, 우즈벡어로 실크로드를 의미)’라는 단어 하나로 간단히 뭉개지는 것이다.8)동서남북 사방에서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온 투르키스탄 오아시스 정주민 사회에서 마할라는 그들의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으며, 여성은 어머니라는 관습과 전통의 전달자이자 임신과 출산을 통해 종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 따라서 이를 수성(守成)하려는 관습적 노력은 그들의 민족을 보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약시 크즈 마할리듼 칙마이두만큼 투르키스탄 정주민들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속담도 드물 것이다.


마할라를 벗어난 위구르 여인들


그런데 어딜가나 반전은 존재하는 법. 마할라를 벗어났어도 나쁜 평판은커녕 오히려 존경까지 받는 처녀들도 있다. 우리에게 향비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위구르 여인 이파르한(Iparkhan)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8세기 무렵 청나라 건륭제가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할 당시, 전리품마냥 베이징으로 끌려간 이파르한의 비극은 그 실체가 불분명함에도 위구르인 사이에서 숭고한 저항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방문했을 때, 어느 위구르 민족주의자의 저택에서 마흐무드 카쉬가리의 초상 옆에 나란히 걸린 이파르한을 보고 의아해 물은 적이 있다.9)이파르한이 마흐무드 카쉬가리에 비견될 위대한 인물입니까?”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이지요. 그녀는 침략자에 저항하다 죽었습니다. 최후까지 위구르임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과연 그들의 마음 속 이파르한은 결국 죽어서까지 순결을 잃지 않고 수천 리를 거쳐 그녀 마할라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사진 5> 위구르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파르한의 초상이다. 하지만 그녀의 고사(故事)는 위구르만이 아닌 한족에게도 샹페이(香妃)’로 공유되고 있다. 더구나 이파르한의 실존인물로 추정되는 롱페이(容妃)는 건륭제의 총애를 받으며 천수를 누렸고 그녀의 친인척들 역시 저항은커녕 고위직에 오르며 청조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파르한 말고도 예외(?)는 더 있다. 두 번째 주인공 역시 위구르 사람들 가운데 단연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쯤 되면 약시 크즈 마할리듼 칙마이두라는 말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 주인공은 조금 특별하다. 한족들은 그녀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샹페이같은 한어식 별명도 없다. 그녀의 이름은 나주굼(Nazugum)’으로, ‘섬세한이라는 뜻의 위구르어 형용사 나죽(nazuk)에서 비롯되었다.10)그러나 그녀의 행보를 보면 이름과는 정반대로 용감무쌍한 여전사가 따로 없다.


1828년 카쉬가르를 지키던 자항기르 호자(Jahangir Khoja)의 위구르 반란군이 청군에 의해 일시에 무너졌을 당시, 피로 물든 고향을 등지고 북쪽의 일리 계곡으로 쫓겨나는 수천의 무술만 유배자들 가운데 꽃다운 소녀 나주굼이 있었다. 카쉬가르부터 일리 계곡에 이르려면 수백리 떨어진 악수(Aqsu)를 거쳐 험준한 탱그리타그(Tengri Tagh: 천산산맥)을 넘어야 했고 그 사이 동사하거나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주굼의 빼어난 미모를 눈 여겨 보던 청조 관리가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했다. 다행히도 나주굼은 야음을 틈타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이때부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그녀를 찾는 병사들을 번번이 따돌리거나 제거하면서 나주굼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부근까지 이른다. 결국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일리장군이 그녀를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리고서야 용감한 나주굼은 붙잡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사진 6>
 위구르의 과거 영웅들을 노래로 되살린다는 평가를 받는 유명 두타(위구르의 전통악기로 기타와 유사하다) 연주자 압두레힘 헤이트(Abdurehim Héyt)가 나주굼이 지난 탱그리타그에서 그녀를 기리는 민족요를 부르는 장면. 유튜브에서 'nazugum'으로 검색하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사진은 유튜브 캡쳐.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짐작하겠지만 나주굼 역시 실존인물이 아니다.11)신장의 최고 권력자인 일리장군이 무슨 까닭으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도피한 가련한 소녀 하나를 못 잡아서 직접 나서겠는가. 게다가 퉁구스 기마대의 추격을 번번이 따돌리고, 또 용맹하게 맞서 싸우기까지 하는 미모의 여성전사란 영화에나 있을 법하다. 사실 나주굼의 서사는 19세기에 동투르키스탄 서남부로부터 일리 계곡까지 유배당한 타란치(Taranchi) 위구르족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민요에서 유래했다. 청군에 패배하고 자유를 빼앗긴 위구르 남성들은 심한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대대로 거주해온 마할라에서 쫓겨났으며 아내와 딸들은 겁탈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신에게 빌어도 보았지만 그들의 울분과 회한까지 달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느 작지만 용감한 소녀 하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힘없는 남성들을 대신해 스스로를 지키는 여성이어야 했다. 그녀는 단지 자기 혼자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민족 전체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이어야 했다.


 

<사진 7> 필자가 2015년 우룸치의 신화서점에서 구입한 소설 나주굼의 표지. 위구르문자 제목은 누주굼(Nuzugum)’으로 쓰여 있지만 원래는 노주금(Nozugum)’ 혹은 나주금(Nazugum)’이었다. 나주굼으로부터 시작된 저항정신의 모티브는 훗날 굴람한(Ghulamxan), 이즈(Iz) 등 다양한 근현대 위구르민족소설에도 차용되었다.


나주굼이 최초의 출판물로 등장했던 1880년대부터 거의 한 세기 반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정신은 잊혀지긴 커녕 오히려 더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고집스런 민족주의 정서는 문학적으로만 표현될 뿐 아니라 실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지는데, 특히 낙샤(naxsha)’로 불리는 위구르의 대중가요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위구르는 이러하다(Uyghur Dégan Mushundaq)> <내 이름은 위구르소녀(Méning Ismim Uyghur Qizi)> <나의 위구르(Uyghurum)>와 같은 제목의 노래들은 최근에 가장 인기 있는 애창곡들이다.12)요즘 한국의 대중가요에서는 한국인은 이러하다혹은 내 이름은 한국소녀’ ‘나의 한국과 같은 애국적 타이틀을 상상하기 힘들다. 웃음거리를 떠나 아예 관심조차 받기 힘들 것이다. 상당수 한국인들이 민족주의 정서를 고리타분한 구닥다리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민족들은 위구르처럼 각자의 고유한 민족정체성을 보전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들이 오랫동안 타민족들과 부대끼며 안정된 조국(weten)과 단합된 민족(xelq we millet)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껴온 까닭이다. 우리에겐 그것이 광복 이전에나 있었을법한 시대의 유산이지만 그들에겐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중앙아시아는 민족의 모자이크와 같다. 모자이크의 색상은 유화나 수채화처럼 섞일 수 없다. 멀찍이 떨어져 보았을 때는 아름답고 조화롭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섰을 때는 날카롭고 예리한 경계선들이 서로를 겨누고 있다. 나주굼의 오빠도 그렇게 말했다. “네가 떠나지 않으면, 칼묵이 너를 범할 것이고, 네가 낳는 모든 아이들은 이교도가 되겠지. 너 자신도 더럽혀진 이교도처럼 되는 거야!” 그러자 나즈굼은 결의에 찬 어조로 노래한다. “그들이 갈대숲을 태워버려도, 내가 강으로 뛰어드는 것까지 막을 순 없겠지. 나는 도저히 그들과 섞일 수 없어. 불순한 마음을 가진 퉁구스인들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 속담의 위구르식 치환은 위구르라틴문자(ULY: Uyghur Latin Yéziqi)를 활용하면 약시 크즈 마할리듼 칙마이두(yaxshi qiz mehellidin chiqmaydu)이다. 즉 우즈벡어와 거의 차이가 없다. 이 글에서는 독자들을 위해 편의상 엘립빠(élipbe)로 불리는 위구르구문자(UKY: Uyghur Kona Yeziq) 대신 ULY를 사용한다.
2) 
20182월 필자가 직접 인터뷰한 타쉬켄트국립동방대학교의 아블랏 호자예프(Ablat Hodjaev) 교수 역시 위구르와 우즈벡은 토쿠즈 오구즈에 그 뿌리를 함께하며 큰 틀에서는 같은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 
꾸란,-누르, [24:31] “믿는 여성들에게 일러가로되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밖으로 나타내는 것 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그리고 가슴을 가리는 머릿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녀의 아버지, 남편의 아버지, 그녀의 아들, 남편의 아들, 그녀의 형제, 그녀 형제의 아들, 그녀 자매의 아들, 여성 무슬림, 그녀가 소유한 하녀, 성욕을 갖지 못한 하인, 그리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린이 외에는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또한 여성이 발걸음 소리를 내어 유혹함을 보여서는 아니 되나니...” [후략]
4) 
우즈벡에서는 에스키보다는 야몬(yamon; 위구르어 yaman)(도덕적인) 부정의미로 더 많이 쓴다.
5) 우즈벡식은 순서대로 아욜(ayol), 자본(javon)이며, 위구르에서 나이가 든 여성이나 잘 모르는 상대는 하늼(xanim; 우즈벡어 xonim)이라는 표현으로 부른다.
6) 
위구르어 yiraqtiki tuqqandin yéqindiki xoshna ela; 우즈벡어 uzoqdagi qarindoshdan ko'ra yoningdagi qo'shinig yaxshi

7) 위구르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이므로 능동적으로 그들만의 고유한 민족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마할라 같은 비()국가적 전통문화의 매개체가 정체성 유지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8) 2007년부터 현재까지 신장 현지에서 만난 여러 중앙아시아 민족들로부터 실크로드(Silk Road) 혹은 이팍욜리(yipek yoli)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의 지역을 부를 때는 주로 자신의 고유국명, 지역명 혹은 조국(weten)’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다만 현지의 박물관, 여행안내소, 관광기념품점, 여행사 등에는 yipek yoli 혹은 丝绸之路(sichouzhilu), 丝路(silu)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9) 마흐무드 카쉬가리(Mehmud Qeshqiri)는 최초의 아랍-투르크어사전(Dīwān Lughāt al-Turk)를 편찬한 11세기 카라한조의 대()학자로서 한국에 비유하면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인물이다. 그의 출신지가 카쉬가르 근교의 오팔(upal)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위구르족의 위인으로 볼 수 있지만,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전 투르크 세계에서 존경을 받는다.

10) 나주굼의 본래 이름은 별꽃이라는 뜻의 촐판굴(cholpangül)이었는데 자라나면서 그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주변의 관심을 끌면서 나주굼이 되었다.

11) 놀랍게도 굴자시 아라-오스텅(ara-östeng) 지역의 불락베시(bulaq beshi) 마할라에 나주굼의 무덤이 있다.

12) 순서대로 신장 마랄베쉬(Maralbesh) 출신의 모민잔 아블리킴(Möminjan Ablikim), 카자흐스탄 야르켄트(Yarkent) 출신의 사니얌 이스마일리(Saniyam Ismayli), 신장 우룸치(Urumqi) 출신의 에스케르 콕보레(Esqer kökböre)의 노래들이다.





※ 전문가 칼럼은 첨부파일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