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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전문가칼럼] 중앙아시아 네오샤머니즘의 부활과 문화적 반향

  • 작성자 박영은
  • 등록일 2018.01.04

중앙아시아 네오샤머니즘의 부활과 문화적 반향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부교수 박영은


1.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 전통, 구소련 붕괴로 되살아나다!

구소련의 붕괴는 중앙아시아 사회 상층부에서 주도한 정치·경제적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 기층부의 의식에도 큰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중앙아시아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있어 ‘샤머니즘(Shamanism)’이 주요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것 역시 이런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을 이슬람 문화권으로만 인지하는 경향이 적지 않으나, 사실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전 이 지역 여러 민족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샤머니즘이었다.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종교적 관념과 믿음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던 학자 블라지미르 바실로브(В.Н. Басилов)는 특히 카자흐인들에게 샤머니즘은 이 지역에 이슬람이 정착되기 이전 종교 전통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카자흐 민족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카자흐스탄이 러시아로의 합병이 완료된 시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는 이슬람이 널리 확산되어 갔다. 이런 현상으로 지역 샤먼들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고, 이에 그들은 동족의 삶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나름의 자구책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샤머니즘 행위들이 이슬람의 교의학이나 신화학, 의례 등에 적용되어 갔다. 바실로프는 이를 ‘이슬람화된 샤머니즘 행위(Исламизированное шаманство)’로 정의하기도 했다. 물론,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과 샤머니즘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규범과 분명하게 대립되는 샤머니즘의 제 특징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특히 1917년 10월 혁명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소비에트 체제가 정착된 이후 샤머니즘의 영적 흐름은 공식적으로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샤먼을 엉터리 의료시술자 혹은 새로운 과학과 논리의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적 믿음의 고수자라 치부하며 박해했다. 그들에게 샤머니즘은 가짜 치료사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고자 만들어낸 ‘봉건적 미신’에 불과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특히 샤머니즘의 경우에는 파괴할 만한 교회나 사원이 없었기 때문에 샤먼들 자신이 탄압을 받아야 했다. 중앙아시아 전통 문화에서 샤먼이 지니는 사회적 중요성으로, 소비에트 권력은 토착민들의 삶에서 전통적인 영향을 소멸하기 위한 전략으로 샤먼을 타겟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변화된 사회 분위기의 영향일까? 이후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샤먼 전통의 복원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는 19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샤머니즘을 미신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 태동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학문적으로 ‘네오샤머니즘(Neoshamanism)’으로 규정되는 이 운동은 제도화된 종교나 정치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과 맞물리며 전개되었다. 고대의 지식과 힘이 현대적 형태로 발현된 네오샤머니즘은 샤머니즘의 옛 형태의 부활을 의미하며, 영적인 세계와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포괄한다. 특히 오늘날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경우, 네오샤머니즘은 소비에트 이후 관찰되는 샤머니즘과 연결된 전통문화 부활이라는 현상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염두에 두며 샤머니즘이 새롭게 대중의 관심을 끌고,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이 전통에 대한 향수와 복원 욕구를 표출했다고 평가되는 구카 오마로바(Guka Omarova)의 영화 『샤먼(Баксы)』(2008)에 주목하고자 한다.

2. 영화『샤먼』, 유목문화와 결합된 카자흐족의 치유 행위와 뿌리찾기 의식을 체현하다!

카자흐스탄에 계승되고 있는 샤머니즘 전통을 재현하고 있는 영화 󰡔샤먼󰡕은 실제 이 지역의 유명한 샤먼인 ‘비-파티마(Би-Фатима)’의 행적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구카 오마로바가 『샤먼』을 제작하게 된 배경에는 그녀와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 해 왔던 스승 세르게이 보드로프 1세의 역할이 컸다. 평소부터 샤머니즘에 관심이 있었던 세르게이 보드로프는 카자흐스탄에 실존하는 대샤먼의 형상이 흥미로운 영화 소재가 될 것이라며 구카 오마로바를 설득했고, 시나리오 집필 과정부터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장면 1] 실제 샤먼인 비-파티마의 제의 장면

영화는 다큐멘터리 촬영 방식처럼 비-파티마가 실제 의례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감독은 비-파티마에게 영화의 샤먼 역으로 출연해 줄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가 거절하면서, 영화에는 처음 출연하는 연극배우 네십쿨 오마르베코프가 대신 샤먼 역을 맡았다. 오마르베코프는 비-파티마를 찾아가 그녀의 여러 행동과 면모를 관찰하고 이를 자료로 삼아 연기를 하였다. 카자흐스탄의 스텝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유목문화와 결부된 샤머니즘 의례가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감독 구카 오마로바가 카자흐스탄 샤먼의 주된 역할로 재현하는 것이 민중을 도와주는 봉사자로서의 모습이다. 물론, 치유자로서의 샤먼의 면모는 카자흐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민족 샤먼의 행위에서 발현되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샤먼들은 다른 세계의 영들과 소통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치료하거나 예언을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아파슈카’라 불리는 샤먼 아이단이 자신을 찾아오는 의뢰인들에게 실종된 사람이나 잃어버린 가축의 위치를 알려주기도 한다. 이는 일종의 의식변화 상태인 ‘트랜스(trans)’ 상황에서 샤먼이 ‘엑스타시’나 ‘포제션(possession)’을 통해 영을 몸주로 받아들이는 영력(靈力)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장면 2] 양의 피로 여인을 치유하는 장면

영화에서 샤먼은 환자들의 몸과 영혼을 치료하면서 그들에게 깃들었다고 여겨지는 악귀를 쫓는 의식을 병행한다. 이는 질병의 원인을 사악한 영에 의한 것으로 인식했던 원시적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입각해 샤먼이 환자를 치유하는 의식에서 양이나 염소를 죽여 그 피를 사람의 몸에 바르는 모습이 재현된다. 이는 고대의 이교도 의식에서 인간이 따뜻한 동물의 피를 바른 후에 씻어내었던 의례를 모방한 것이다. 또한 성스러운 땅의 힘의 깃든 진흙을 환자의 몸에 발라 악귀를 몰아내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들 행위는 카자흐스탄의 샤먼이 육체와 영혼을 정화하는 것을 치료의 필수과정으로 간주해 왔다는 것을 감독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치료법은 유목문화를 기저로 하는 중앙아시아의 지리적 인자가 샤먼의 행위에도 용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독은 오래전부터 카자흐인들의 민족의식에서는 유목민 생활에 상응하는 샤머니즘적 믿음이 우세하였다는 관점을 영상으로 극화하며, 유목문화와 샤머니즘의 습합(習合)이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에 내재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장면 3] 진흙을 몸에 발라 여인을 치유하는 모습

뿐만 아니라 구카 오마로바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개자인 샤먼이 ‘인간의 공간’과 ‘초자연적 신격의 공간’을 오고가며 성(聖)과 속(俗)의 공간을 매개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스크린으로 제시한다. 샤먼은 비가시적 세계를 투시하는 엑스타시를 통해 현세의 쇠사슬에 갇힌 이들이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때문에 영화에 재현된 샤먼의 행적에서 또한 중요하게 부각되는 특징이 공동체 구성원을 위한 봉사이다. 감독은 본래 샤먼이 공동체의 강력한 권위자로서 일상적인 세계와 영혼의 세계를 오가며 봉사하는 영혼의 인도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샤먼은 그 역할이 점을 치는 사람으로 축소된 경향이 없지 않다. 하지만 원래 샤먼의 존재는 산업사회에서 의사, 심리치료사, 투사, 점술사, 사제, 정치가 등으로 분화된 모든 역할을 포괄했다. 때문에 영화에서는 이런 차원에서의 샤먼의 본래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샤먼 아이단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우며, 그들이 선한 믿음의 법칙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런 올곧은 의식 속에서 지역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그녀의 강력한 내적 힘이 분출된다.
카자흐스탄에서 큰 어른과 같은 존재로 대접받는 아이단에게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원천을 제공하는 곳이 그녀가 발을 딛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대 튀르크족에게서는 대대로 조상들 터전의 산신(山神)을 숭배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샤먼 아이단이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진 우르군타스를 지키는 인물로 설정되어 그 산신 숭배의식을 복원하고 있다. 이른바 카자흐 정신의 구현자인 그녀는 이 곳 ‘우르군타스’ 성산을 지키는 수문장 이미지와 결합되어 민족의식 확산에 강력한 파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샤먼 아이단이 오랜 세월 성산에서 살아온 카자흐 선조들의 삶과 그들에 대한 기억을 중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신적 뿌리를 인식하는 그 힘이 그녀의 도덕성과 신성한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에 근거해 영화에 표출된 샤머니즘은 개별적인 인간 특성 묘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의미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의식의 원천을 통해서만 집단화된 민족의 보편적 삶이 지탱될 수 있으며, 문화의 원형질인 샤머니즘은 인간의 집단 무의식과 심리를 대변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감독은 샤머니즘 재현 영화를 통해 카자흐족에게 정화와 치유의 의식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현재를 성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3. 영화 『샤먼』, ‘아이의 회생(回生)’ 메타포를 통해 카자흐스탄에 희망을 제시하다!

구카 오마로바는 샤머니즘의 전통 재현뿐만 아니라 오늘날 카자흐스탄이 안고 있는 사회문제들을 노출시키며 이에 대한 관객들의 의식의 변환을 촉구하기도 한다. 감독은 구소련 체제 당시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성산 ‘우르군타스’ 지역에 어느 날 범죄자 출신 투기꾼들이 들이닥치는 현장을 재현한다. 석유사업을 하는 이들 신흥부자들은 이 땅을 개발하여 주유소와 레스토랑, 게임장 같은 유흥시설로 한 밑천 잡으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감독은 현 카자흐스탄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에 자본주의 시장화 개혁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척했던 소수 비즈니스 엘리트나 금융독점자본을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쥔 ‘올리가르히’들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 이들 투기세력들은 개발을 이유로 성산을 파헤치고 땅의 정기를 짓밟아 버린다.
이 과정에서 올리가르히들은 추진 사업의 걸림돌인 샤먼을 강제로 쫓아내려 온갖 시도를 하지만, 그녀는 이 땅을 떠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성산을 지키려 발버둥 쳤던 샤먼이 자본주의 개발에 맞서 홀로 싸우는 것은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이에 샤먼은 자신의 숨을 갑자기 멎게 하는 방식으로 거짓 죽음을 시도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사망했다고 슬퍼하며 추도식을 하던 날 밤, 몰래 일어나 ‘샤먼의 징표인 지팡이’와 무녀의 제의를 꺼내들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그녀의 땅에 건립되었던 주유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한다.
영화에서는 과연 누가 불을 질렀는가에 대한 구체적 해명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다시 살아난 샤먼이 투기세력들에게 복수를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뿌리 깊은 전통과 근대화의 충돌을 극화시키는 감독은 이른바 ‘복수의 메커니즘’을 무속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즉 세상의 불화와 알력에 대해 대등한 방법으로 피해자가 응당한 조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샤머니즘이 개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샤머니즘은 개인에 대한 원망이나 집단에 대해 한(恨)을 푸는 해소의 역할과 함께 오늘날 카자흐스탄 사회의 마이너리티를 대변하고 그들을 결집하는 사회적 기능 역시 수행하고 있다.
샤먼 아이단이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 초자연적인 영화의 분위기는 범죄영화 혹은 액션영화 분위기로 전환된다. 그리고 우르군타스 성산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던 지역 사업가 ‘바틔르’와 관련된 플롯이 전면에 부각된다. 영화 초반부에 바틔르는 외부 투기꾼들의 요구에 땅을 팔려는 의사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샤먼 아이단이 이 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래전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했을 때 샤먼이 도와주어 원했던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외부 투기세력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바틔르는 샤먼이 그들에 저항하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히 돌변한다. 이제 그는 아이단을 대신해 이 땅을 지키려 노력하며 결국 그들에 대항하는 선봉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투기세력들과 전면전을 펼칠 수밖에 없게 된 바틔르는 아들을 납치당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직면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현시대 카자흐스탄 사회에 대한 비판을 넘어, 방향성을 상실한 카자흐인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어딘가로 사라졌던 샤먼이 다시 카자흐스탄 스텝으로 돌아와 끝까지 이곳을 지켜내는 그녀의 행보를 통해 부각되고 있다. 바틔르는 샤먼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아내고, 여기서 아이단은 자신을 대신해서 성산을 지키려 했던 그를 도와주기 위해 재등장한다. 샤먼이 가르쳐 준대로 아들을 찾아나선 바틔르의 행보는 범죄 세력과의 총격전으로 이어지고, 이 싸움에서 그는 결국 사망한다.

이제 고아가 된 소년은 아이단과 함께 머물렀던 성산으로 되돌아오고, 샤먼 역시 홀로 남겨진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이곳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주인이 부재했던 공간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다. 아이단이 떠나게 되자 무분별한 개발이 자행되었던 땅이 그야말로 죽음의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샤먼 아이단을 통해 강조되는 카자흐족의 뿌리 찾기 인식의 문제는 삶의 터전인 환경에 대한 재인식, 샤머니즘의 정신 회복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염원으로 확장된다. 영화에서 이를 상징하는 것이 납치되어 생명을 잃을 뻔했던 아이가 되살아나는 모티프이다. 감독은 폐허가 된 카자흐스탄 땅에 돌아온 샤먼이 아이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임무를 부여한다.


[장면 4, 5] 죽어가는 아이를 되살리는 샤먼의 의례

여기서 샤먼은 기력을 거의 잃은 아이의 등에 새 형상을 그리고, 이것을 피로 칠한다. 그리고 구덩이를 파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그 곳에 아이를 눕혀 땅의 정기를 받도록 한다. 이것은 앞서 아이가 납치되어 차 트렁크 속에 갇혀 죽어가던 모습과 대조되는 장면 설정이다. 불임의 부부에게 기도를 통해 아이를 갖게 해 주었던 샤먼의 행위는 소비에트 시대에 자신의 가치관을 계승하는 자식을 얻지 못했던 카자흐스탄이 자신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생명체를 얻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개발의 논리 속에서 그 소중한 아이가 납치당했다는 것은 또 다시 정체성을 상실한 카자흐스탄의 위기를, 그리고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갔던 아이에게 호흡을 불어넣는 소생과정은 카자흐스탄의 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감독의 염원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장면 6] 차 트렁크에 갇혀 있던 아이 [장면 7] 땅 속에서 치유중인 아이


여기서 소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던 폭력에서 벗어나 만물의 상호 관련성을 통찰하는 ‘직관’과 ‘영성’이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는 구카 오마로바가 자연 파괴의 이면에 내재하는 여성의 학대, 인간 감성의 학대, 영성의 학대에 주목하며 ‘어머니 자궁’을 통한 재생을 강조하는 것과 동일한 궤적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영화는 자연이 상징하는 여성적 원리의 발견과 여성성에 대한 재인식을 생명에 대한 성찰과 연결 짓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과 신의(神意) 사이에서 인간의 희구(希求)를 신에게 전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 다시 내리는 ‘샤먼’의 역할을 강조된다. 중간자에 의해 신의가 지상에 전달되는 과정이 이 작품에서 샤먼이 아이에게 행하는 것과 같은 ‘굿’으로 표출된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일체성과 통합적 세계인식이 그 토대를 이루고 있기에, ‘굿’은 정신과 육체,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을 전제로 하는 역동적인 생명 공간의 아우라를 창출한다.


[장면 8, 9] 샤먼의 치유 굿

무속의 세계는 한 민족의 원형적 삶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성원에게 동질감과 소속감을 부여한다. 이런 맥락에서 감독은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삶에 동화된 무속이나 굿이 문화의 한 국면이자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감독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카자흐스탄의 올리가르히와는 달리, 연약한 인간과 여성, 그리고 아이를 보호하는 샤먼의 자비심을 부각시킨다. 샤먼은 이른바 ‘가이아’의 윤리를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세계 질서와 위기에 처한 생태계를 보호하는 여신의 역할 역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네오샤머니즘이 개발 논리에 잠식당한 카자흐스탄을 치유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 역시 강조한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에서 샤머니즘은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 철저하게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한 시도들이 자행되어 왔으나, 샤머니즘은 카자흐인들의 삶의 영역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 영향력 역시 축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근대화가 소외시킨 샤머니즘을 영화의 소재로 다시 등장시키는 󰡔샤먼󰡕은 카자흐스탄 사회 기층부에서 흐르고 있는 ‘무속의 에너지’를 스크린에 투사하여 카자흐인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또 하나의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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