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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전문가칼럼] 우리와 중앙아시아 간 교류흔적을 찾아서

  • 작성자 전대완
  • 등록일 2017.09.06

우리와 중앙아시아 간 교류흔적을 찾아서


전 주 우즈베키스탄 대사 전대완
2017년 9월 6일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중앙아시아 5개국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카스피 해에서부터 천산-파미르고원까지 펼쳐지는 ‘땅’의 나라들, ‘스탄(stan)’ 국가들이 독립함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의 한 중앙에 다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바깥세상은 그간 러시아제국과 소련의 장막 안에서 오랫동안 망각 되었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대의 세상나들이를 호시탐탐 환영했다. 이 지역이 바로 인류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냈던 실크로드(The Silk Road)의 중심구간, 바로 트란속시아나 (The Transoxiana)가 아니었던가. 오늘까지 인류의 삶에 영향을 끼쳤던 어떤 문화라도 이 지대를 오고가며 성숙해가지 않았던가. 그런 역사의 연결고리로 인해선가? 범터키즘(Pan-Turkism)를 앞세우며 “그간 잃어버렸던 한 쪽 팔을 되찾은 격”이라며 반기는 터키, 범페르시아주의(Pan-Persianism)를 앞세운 이란, 이슬람을 앞세운 아랍 제국(諸國), 때 늦게 과거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러시아, 이 때야말로 유럽을 직접 공략할 천금 같은 기회라며 달려드는 중국, ‘세계의 심장이 되돌아왔다며 ‘유라시아의 통합’의 시대를 주창하는 서구 제국(諸國)까지, 중앙아시아에 대해 지구적인 관심을 쏟아붓고 있다. 우리도 1991년 중앙아시아 5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간 결코 만만찮게 경제, 통상, 문화 등, 제반관계를 확대·심화시키며 여타 국가들보다 강력한 선점에서 오는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중앙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물론 중앙아시아 제국(諸國)이 품고 있는 30여 만 명의 고려인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는 인연이라서 경제 외적인 교류의 확장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하겠다. 그러나 수교 이후 4반세기가 흘렀음을 감안하면, 경제나 문화 이외에도, 사회과학적, 혹은 인문지리적 학술교류의 외연도 보다 넓혀나가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고 본다. 특히 역사 속에서 우리와 중앙아시아가 어떠한 교류를 맺었을까, 수 천만 리 머나먼 이역의 땅과 무슨 인연을 쌓았을까 하는 의문이 더한다. 필자는 중앙아시아에서 근무하며 보고 느낀 바로는 상고사 속에서 ‘우리들’과 ‘그들’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하게 연결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 우리가 보다 정밀하게 연구·규명해 나가야 할 일들이겠으며, 그런 단초(端初)라도 제공한다는 마음으로 말에서나, 설화에서나, 역사 속에서 보이는 우리와 중앙아시아 간의 유사성, 또는 공통분모격인 편린 같은 사실들을 굳이 찾아볼까 한다.


첫 번째가 바로 ‘스탄(stan)'이다.

중앙아시아는 바로 ‘스탄’ 국가들이다.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 외에도 스탄 국가들은 많다. 우선 독립국가로서 유엔 회원국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이 있겠고, 또 독립은 하지 못했지만 쿠르디스탄(Kurdistan)도 있겠으며, 러시아 연방 안에는 타게스탄(Tagestan), 타타르스탄(Tatarstan) 등등, ‘스탄’이란 지명을 가진 지역도 많다. 곧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이란 국명은 ‘우즈벡 민족(The Uzbeks)이 사는 큰 땅(stan)’이란 뜻이다. 그런데 ‘스탄’이라는 발음의 ‘땅’이란 의미를 가진 말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땅’이란 말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이제는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그게 바로 우리의 ‘땅’이란 것과 똑 같다는 해석이니 참 경이롭기도 하다.

한번 따져보자. 그러면 1900년 주시경 선생의 한글이 탄생하기 전에는, 곧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으로는 오늘의 ‘땅’을 어떻게 표기했었고, 어떻게 발음했을까? 조선시대의 표기를 살펴보면, 땅을 [ㅅㄷ+ㅏ+ㆁ(옛이응)]으로 표기하고 있다. 자모를 있는 대로 빨리 따라 읽으면, 스탄(stan)이 되지 않는가? 과거에도 녹음기만 있었더라면 그 발음을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우리와는 달리 ‘땅’을 ‘스땅’ 비슷하게 발음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한 조상이 한 땅을 밟으며, 한 하늘을 이고 살았던 때가 있지는 않았을까 자문하게 된다.


두 번째는 설화 ‘흥부놀부’의 원전, ‘황금수박’ 이야기다.

중앙아시아에는 우리네 ‘흥부놀부’ 설화의 원전이 존재한다. 바로 황금수박(A Golden Watermelon)이라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프레임은 똑 같다. 우리판은 흥부놀부가 형제이나 서역 판에는 이웃사촌이고, 우리는 제비의 다리이나 서역 판은 황새의 다리인 점만 다를 뿐이다. 똑 같은 경위를 거치며 똑같은 복을 받고 벌도 받는다. 그러나 흥부놀부 이야기의 요체는 ‘새의 멀쩡한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서 치료해 주며 복 받으려는 심보’에 있겠고, 이런 프레임은 황금수박에도 똑같이 나온다. 결국 같은 설화인 셈이다. 동류의 설화를 공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오가며 살았거나, 혹은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닐까?

우즈베키스탄 설화집 ‘황금수박’ 삽화 일부
[우즈베키스탄 설화집 '황금수박' 삽화 일부 ⓒ전대완]

 

필자가 황금수박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도 참으로 우연이었다. 2010년대 중앙아시아에서는 한류(韓流)가 절정이었고, 특히 한국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 우리 PC를 지원하여 컴퓨터실을 만들어줬다. 개소식에 초청되어 갔다. 주재국 문교장관, 주지사 등 고위급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생들의 축하공연이 있었다. 그런데 흥부놀부 연극이 아닌가! 한국 대사로서 감격한 나머지 공연 후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한국 드라마만 즐기는 줄 알았는데, 한국 설화까지 공부하며 연극화 하니 감격이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문교장관이 살짝 얘기하기를 자기네 설화라는 게 아닌가. 결국 도서관에서 설화집을 가져왔고, 그네들 설화인 게 확인되었다. 기분이 언짢기보다는 또 다른 감격이 왔다. 설화를 공유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설화의 이동은 바로 사람 발걸음의 이동을 말해주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떤 루트의 실크로드를 타고 한반도까지 들어왔는지를 연구해볼만 하겠다.


세 번째는 고구려 ‘바보 온달’의 출생이다.

연세대 지배선 교수는 논문⌜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에서 “바보로 유명한 고구려 온달(·?~590) 장군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며, 획기적이자 파격적인 학설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중국 정사(正史)인 구당서 권 198, 강국전(康國傳)에서 “한대(漢代) 강거(康居)라는 지역에 월씨(月氏)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에서 나온 온씨(溫氏) 성을 가진 사람이 강국(康國, Sogdiana의 왕이 됐다.”고 하는 기록을 근거로 삼았다. 당시 소그디아나와 고구려 사이에는 비단길(혹은 ‘담비의 길’이었던 초피로貂皮路)을 통한 교역이 빈번했음을 고려하면 온달이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한 것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참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우리역사 강역(疆域)을 확장시키는 세기적인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또 다시 따져보자. 실크로드 선상에서 장사에 도통(道通)했던 것으로 평판이 자자한 소그드 사람, 카라반(caravan) 대상(隊商)들이 뭘 구하려고 천산과 파미르고원을 넘나들며 그토록 먼 고구려의 땅, 만주와 연해주까지 어려운 총총걸음을 했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줄 실마리가 되는 옛날 실크로드(Silk Road)의 루트와 품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실크로드는 한두 길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분류만 해도, 지금 학계에서는 3개의 종심(縱深)이 되는 루트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 비단이 주로 교역되었던 이스탄불과 서안(옛 長安) 간의 오아시스로드(Oasis Road), 그 윗 지대의 대륙을 가로지르며 주로 초피(貂皮-담비가죽)가 교역되었던 흑해와 만주 간의 스텝로드(Steppe Road), 또 남쪽 바다로 연결된 남해로(南海路)가 그것들이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담비 가죽옷은 왕실이나 귀족층만 즐겨 입었던 귀물(貴物) 중의 귀물이었다. 로마에서는 무게만큼의 금보다도 더 가격이 나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중에도 연해주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고구려 담비가죽은 당대에는 최고의 상품이었다고 한다. 소그드 대상들이 이 담비가죽을 대량 확보하려고 고구려까지 출입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상상력을 좀 더 비약시켜 보자. 소그디아나 왕실은 실크로드 교역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던 관계로 대상들을 이끌고 만주까지 빈번히 왕래했을 것이다. 최근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연해주 바닷가까지 올라와서 정착촌을 만들며 눌러앉아서 상역(商易) 활동을 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현지화 하다시피 한 소그드 왕가의 일원들은 큰 경제력의 소유자들로 고구려 사회에서도 당당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관계로 왕가끼리 혼사가 진행되었을까, 아니면 따로 고구려 여인을 취했을까? 아직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우여곡절의 끝머리에서 온달이 탄생했을 것이고, 정치적 연합 또는 결탁의 필요로 인해 온달과 평강공주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는 않았을까? 온달이 평원왕(平原王)의 부마(駙馬)가 되었으니, 결국 소그디아나와 고구려는 사돈지간의 나라가 된 게 아닌가?


네 번째는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궁전의 사신도 벽화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연고를 일깨우듯, 1965년에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역사 지평 위에 불쑥 나타나는데,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궁전의 벽화가 바로 그것이다. 벽화들 가운데 사신도에는 새 깃털이 꽂힌 조우관(鳥羽冠)과 손잡이 끝이 환형(環形)인 환두대도(環頭大刀),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자세(拱手姿勢)의 고구려 사신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에는 강국의 마지막 왕, 와르흐만王(650-670 재위)이 각지에서 온 사신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돌궐인, 터키인, 중국인, 티베트인, 고구려인 등등의 사신들로 바글바글 하다.

아프로시압 궁전의 '사신도' 벽화 일부
[아프로시압 궁전의 '사신도' 벽화 일부 ⓒ전대완]

 

그러면 당시의 국제정세를 한번 가늠해보자. 당나라는645년 1차의 고구려 침공이 실패한 후 전열을 다시 정비하여 661년 대대적으로 재침공해 왔으며, 결국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했다. 그러니 벽화의 내용은 그것보다는 조금 이전이었을 것이다. 와르흐만王의 재위기간를 감안하면, 조성될 당시에는 고구려가 당나라의 위협과 침략에 풍전등화의 처지였을 것이니 화급한 도움을 청하러 사돈의 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아닐는지? 고구려로서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외교만이 생존의 길이었을 터, 서역에서 당나라 후미를 공격하게 되면 전선(戰線)이 동서로 분할되니 당나라 침공의 예봉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은 소그디아나에 사신을 특파하여 위급을 알리며 천산 너머 당나라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공격해 달라지는 않았을까? 벽화는 먼먼 옛날부터 우리가 서역까지 친교를 맺었음을 알리며, 우리가 일찌감치 중국을 뛰어넘어 세계인으로 살았음을 웅변하고 있지는 않은가. 서역, 즉 오늘의 중앙아시아는 옛날에는 생각 이상으로 가까웠던 우리의 이웃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상으로 그나마 확실한 흔적들에 대해 이야기해봤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생태학적 기원이랄까, 민요의 뿌리랄까, 아직까지는 미약하나마 무궁무진한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아리랑만 해도 그렇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라는 구절 말이다. 행여 “아르(Amudaria)와 쓰르(Syrdaria)가 아랄(Aral Sea)을 만드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 옛날, 서역 남정네들이 ‘황금의 나라’인 신라를 찾아 자꾸만 동쪽으로 길을 떠나니 아무다리야 남강(南江)이나 쓰르다리야 북강(北江)이란 크나큰 물을 죽자사자 건너도 10리도 못 가서 만년설이 덮인 천산과 파미르를 만나게 되고, 결국 발병 나서 돌아오게 될 터이니 아예 집 떠날 엄두조차 내지 말라는 부녀자들의 애끓는 비가(悲歌)는 아니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우리와 중앙아시아 간에 경제나 문화 분야에서의 교류가 확대되는 만큼이나 서로 오가며 공유했던 아마득한 옛 역사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우리와 서역 간에 오고간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까지는 전무한 형편이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그림이나 설화의 형태로나마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는가. 또 아직까지 판독 불능 상태에 있는, 고대 아랍어, 돌궐어, 페르시아어 등으로 기록된 많은 사료(史料)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사마르칸트의 아프로시압 사신도나, 더 멀리 이탈리아에 페테르 루벤스(Peter P. Rubens)의 ‘한복 입은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등이 있고 보면, 그 옛날 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 서역 땅을 거치며 이탈리아 로마까지 걸음 했음을, 실크로드의 동단이었던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실크로드 서단이었던 로마를 연결하였음을 감히 상상하지 못 할 까닭은 없겠다. 우리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천년 묵은 사실(史實)들이 세상에 재탄생될지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사료(史料)가 너무 부족하다고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우리부터 흔적을 찾아 나서야겠다. 특히 중앙아시아 학술기관들과 학문연구 네트워킹을 구축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연구토양이 제공되어야겠다. 곧 우리외교의 외연(外延)를, 더 나아가 우리역사의 강역(疆域)을 보다 넓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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