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전문가 칼럼

중앙아시아 출신 작가, 한인 배우들의 예술혼에 불을 지피다.

  • 작성자 박영은
  • 등록일 2021.05.28

중앙아시아 출신 작가, 한인 배우들의 예술혼에 불을 지피다

 

 

박영은(한양대학교)

 

 

오늘날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극장......

그 곳은 강제이주의 트라우마 속에서 고려인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했던 구심체였다.고려극장은 고려인 관객들에게 공동체적 공감대를 극대화하고 이를 최대한 확장시켜줌으로써 고려인 사회를 결속시키는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극장의 실질적인 기원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러시아 극동 연해주 고려인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예술 활동 모임들로 거슬로 올라갈 수 있다. 당시 그곳에서는 콜호즈를비롯한집단적생산단위를바탕으로운영되던아마추어예술집단이구성되었는데, 이 소예술인 집단은 연해주 전역의 한인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의 학교, 공장, 농촌 및 어촌 등에서 유행하였다. 하지만연해주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고려극장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지시에 따라 고향 극동에 모든 것을 남겨둔 채 떠나가야 했다.

 

             고려극장의 단원들(1950년대 초반)

 

여하튼어렵게 정착하게 된 카자흐스탄에서 고려극장은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현지의 선진 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전문적인 문화 발원지로 성장해갔다. 거의 90년에 임박해 오는 고려극장의 공연사에 연성용·태장춘·한진과 같은 우리 작가들의 희곡들뿐만 아니라 세익스피어·몰리에르·골도니를 비롯한 서양 고전작가들의 작품, 오스트로프스키·고골·고리키와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희곡이 두루 상연되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에서는 소비에트 민족들의 위대한 우정이라는 표어 아래, 러시아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 외에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민족 공화국의 대표 작품들도 상연 레페토리에 다수 포함시켰다. 특히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작품들이 다수 소개되었는데, 키르기스스탄의 작가 친기즈 아이트마토프(Чинги́з Айтма́тов)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지난한 삶과 애환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미학의산실이었던 만큼, 민족의 정신을 재확인받고 영혼의 상처를 위로받는 이러한 극장의 기능에 부합했던 것이 아이트마토프의 희곡 상연이었던 것이다.

고려극장 관계자들은 실제로 아이트마토프를 만나기도했는데, 이것은 고려극장 관계자들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다. 철학적 깊이를 지니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아이트마토프의 작품들은 소비에트체제하의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 고려인들이 그의 작품을 친근하게 느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인간영혼의가장내밀한비밀들을간파하는동시에 보편적인인간의문제를작품 속에 형상화했기 때문이었다. 

키르기스 민족의 신화나 전설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리키문학대학에서 작가 수업을 받았던 친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푸쉬킨·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문학전통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스탄의 문화발전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그의 위상은 강력한 것이었다.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즈의민족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무한히 노력하며 자기민족의 뿌리와 선조들의 지혜를 정신문화유산으로 확장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민족의혼을 독창적인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려는 아이트마토프에게 고려인들은 자연히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작가친기즈아이트마토프 이미지와<어머니의 들판> 책 표지

 

여하튼 고려극장 측은 작가와의 만남 이후 그의 소설 빨간색 스카프에 있는 나의 작은 포플러(Тополек мой в красной косынке)><어머니의들판(Материнскоеполе)>를 무대에 올렸는데, 특히 <어머니의 들판>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은 대지와 인간,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의무, 모성애와 우정, 휴머니즘과 조국애의 테마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 공연에서 선명하게 형상화되었던 작가의 세계인식과 영혼을 울리는 삶의 진실은 한국인 독자와 관객이 그를 사랑하는 근간이 되었다. 때문에 극장 측은 오래전부터 소설 어머니의 들판을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꿈꾸고 있었다. 또한 극장 관계자들이 작가와 면담을 할 즈음 카자흐스탄 드라마극장에서는 이 연극이 상연되고 있었다. 이 영향을 받아 고려극장 역시 카자흐스탄 드라마극장측과의 협업을 통해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이 연극은 톨고나이라는 여인이 죽은 가족을 회상하며 들판에 말을 건네는 대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짊어졌던 무거운 짐과 시련을 듣게 된다. 먼저 관객들은 그녀의 독백을 통해 그녀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 어린 시절부터 톨고나이는 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왔다. 열일곱살 무렵 수반쿨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고, 공동의 노동으로서 자신들의 평범한 삶을 형성해나간다. 트랙터기사였던 수반쿨과의 사이에서 톨고나이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 카심은 콜호즈에서 콤바인기사로 일했다. 이후 큰아들은 알리만이라는 여성과 사귀게 되었고, 톨고나이는 며느리를 기쁘게 맞이했다. 둘째아들 마셀벡은 학업을 위해 도시로 떠났고, 막내아들 좌이낙은 콜호즈에서 서기로 일했다. 이러한 가족의 성장과정을 풀어놓는 노년의 톨고나이의 입을 통해 관객들은 이들 부부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며 성심껏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온 과정을 목도한다.

하지만 전쟁은 그녀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다. 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은 큰 아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사망해 톨고나이와 며느리는 일시에 과부신세가 된다. 둘째아들 마셀벡 역시 전쟁터에 나갔지만 사망했고, 막내아들은 행방불명이 된 상태이다. 톨고나이는 함께 살고 있는 젊은 며느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다른 곳에 시집보내기를 원했다. 그 즈음 마을에는 목동으로 일하는 새로운 청년이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톨고나이는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이에 마을사람들은 알리만이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이웃마을에 사는 목동에게 가서 알리만과의 혼인을 요청하려 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목동은 유부남이었고 그의 아내는 톨고나이와 함께 온 마을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알리만은 아들을 낳지만 출산과정에서 사망한다. 톨고나이의 이웃들은 그 아이를 함께 먹이고 가르치며,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돕는다. 온갖 삶의 역경을 안고 살아 온 톨고나이는 인생의 회한을 들판에 풀어놓고는, 자신은 결코 과거를 잊지 않겠다고 들판에게 약속한다. 살아있는 동안에 가족을 잊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손주가 자라게 되면 이 모든 가족 얘기를 들려 줄 것이라고 다짐하는 것으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어머니의 들판>은 전쟁으로 빚어진 비극이지만, 아이트마토프는 전투가 벌어지는 들판도, 그 곳에서 다치고 사망한 사람들도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그 어떤 잔혹함도 드러나지 않지만, 전쟁의 공포는 어머니의 감정과 사랑하는 여인의 감정을 통해서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들판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연극이 카자흐스탄과 고려인 연극인들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카자흐국립극장의 감독이자 민족 배우인 맘베토프(А. Мамбетов), 알마티음악원 교수이자 소연방민족배우인 주바노바(Г. Жубанова), 카자흐공화국의 민족예술가이자 카자흐국립합창단 지휘자인 몰로도프(А. Молодов)는 고려극장의 연극 제작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맘메토프는 고려극장 스텝들의 작업에 섬세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이 연극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관점을 강요하거나 무대 예술 등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결코 자기 주장을 강요하지 않았다. 반대로 고려극장 스텝들의 창작 의도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맘베토프의 조언과 가르침은 아이트마토프 이야기의 시학과 작품의 민족적 색채를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이 연극이 보다 더 역동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했다.

<어머니의 들판>이 고려인 관객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극작가 한진(1931-1993)의 맛깔스런 번+역에도 힘입은 바가 컸다. 한진은 한국어와 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이 점이 그가 고전작품들을 훌륭하게 번역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진은 1964년에 고려극장에 들어가서 세상을 떠난 1993년까지 12편 이상의 탁월한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고 20여 편의 외국희곡을 번역하였으며 수많은 연극의 연출과 감독을 맡았다. 무엇보다 한진은 우리의 고전들을 현지의 문화적정신적 바탕에 접목시켜 새로운 미학으로 발현시켰다고 보는데, 이 점 역시 고국에서 받은 교육과 구소련에서 익힌 새로운 지식이나 삶의 경험이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경험을 통해 한진은 러시아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문화접변(acculturation)의 양상을 적절히 부각시켰고, 이것은 관객들의 감수성에도 더 큰 울림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박마야>                                   <이함덕>                      <박소피아>

 

사진출처한인일보 Kazahstna News in Korean, https://haninnews.info/

 

그 외에도 이 작품에 관객들이 열광했던 이유에는 톨고나이의역을명의한인 여배우가동시에 맡는 방식을 도입한 연출력도 한 몫을 차지했다. 어린 시절의톨고나이역할을것은마야,어머니톨고나이의역할은소피아,할머니톨고나이는연극 초반부에 등장해 어머니대지와대화를이어간이함덕이맡았다. 연극의 첫 장면은 백발인 된 톨고나이이함덕이서사를 이끌고 가지만, 무대에는사랑에빠진소녀톨고나이마야가등장한다.떠오르는 태양의 햇살을 받으며 기쁨에 들떠 있는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자 운명인 수반쿨을향해 간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전쟁 발발로 운명은 톨고나이의 행복을 조롱했고, 위협적인 전쟁의 얼굴은 박 소피아가 맡은 중년의 톨고나이에게 슬픔을 드리운다. 잔혹한 전쟁의 울림이 그치자, 전쟁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빼앗긴 노년의 톨고나이 얼굴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린다. 세 명의 여배우는 각각의 역할에 충실하며 한 여인의 삶을 재조명한다.

천진난만하게 어린 톨고나이의 삶을 창조한 박 마야는 서정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찬란한 처녀시절을 보여주었다. 보다 더 다층적이고 드라마틱한 부분을 맡은 것은 박 소피아였다.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박 소피아는 강한 의지를 지닌 여성, 위대한 인성을 지닌 인물로 성숙해간다. 그녀는 쉽지 않은 심리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남편과 자식들을 잃은 여인의 비극적 감정을 오롯이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의 무게중심은 고단한 삶을 평생에 걸쳐 견디어 온 이함덕에게 놓였다. 그녀는 처녀시절, 중년여인이 된 톨고나이와 한 무대에 서서 복잡다단한 심적 체험과 작가의 사상을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이함덕이 창조한 톨고나이의 형상은 재능있는 여배우의 능력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오늘날까지도 고려극장 연극사에서 <어머니의 들판>대표적인 성공작으로 일컬어지는것은 고려인들에게 큰 공감을 받았던 한진의 번역과각색 능력뿐만이 아니라세심한연출력과배우들의 열연, 카자흐국립극단측의 조력과 조언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고려극장 관계자들은 중앙아시아 예술인들로부터 전통 춤과 노래를 전수받기도 했으며, 연출이나 연기에 대한 조언을 얻기도 했다. 무대 장식과 소품, 의상과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중앙아시아 극단과 함께 준비해 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의가장 주요한 요인은 중앙아시아 출신 작가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작품에 드리우고 있는, () 많은 여인으로 대변되는 민족의 애환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공명하며 한인 배우들의 예술혼에 뜨거운 불을 지폈기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