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앙아시아 협력의 시간: 문화유산은 신뢰의 인프라다
김덕순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 정책개발실장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에너지, 인프라, 교역 등 경제적 요인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국가 간 신뢰와 협력을 오래 지탱하는 힘은 숫자나 계약이 아니라 공동의 기억과 연결에서 비롯된다. 한국과 중앙아시아 간 문화유산 협력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유산은 단순한 교류의 소재가 아니라, 신뢰를 축적하는 장기적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경제협력은 계약을 통해 성립되지만,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상호 이해와 존중의 축적 위에서만 지속된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며, 관계의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다.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지정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실크로드라는 거대한 문명 네트워크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연결되어 왔다. 이제 그 연결을 상징이 아니라 정책으로, 행사가 아니라 구조로 전환할 때다.
아프로시압 벽화 속 신라 사신, 연결은 이미 시작됐다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투르키스탄과 오쉬 같은 도시들은 동서 문명이 교차한 공간이자 종교와 예술, 기술과 상업이 어우러진 인류사의 무대였다. 이 지역의 문화유산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불교와 이슬람, 유목과 정주 문화가 중첩되며 형성된 다층적 기억의 집합체다.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역로가 아니라 사람과 사상, 공예 기술과 미적 감각이 오간 문화의 통로이자 용광로였다. 이러한 연결성은 상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인근 7세기 아프로시압 벽화에는 각국 사절단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신라 또는 고구려 사신으로 해석되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삼국시대 한반도가 이미 실크로드 문명권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만남은 최근의 일이 아니라, 고대 문명 교류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는 오랫동안 스스로의 역사와 문화를 주체적으로 서술하기 어려운 시간을 겪었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 체제 아래에서 이 지역은 제국의 주변부로 편입되었고, 역사 서사와 문화정책 또한 중앙의 틀 속에서 재편되었다. 1991년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각자의 언어와 전통, 문화유산을 재발견하며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 왔다. 문화유산은 이들 국가에 있어 정체성 확립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는 국제무대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현황을 보면, 이 지역은 다국가 공동등재 비율이 약 53%에 이를 정도로 높은 수준을 보인다. 이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나우르즈와 같은 명절, 전통 유목문화와 관련된 관습, 전통공예와 의례 등 다양한 유산이 국경을 넘어 공동으로 등재되면서 ‘공유유산’이라는 개념이 제도적으로 구현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중앙아시아는 문화유산을 국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의 자산으로 다루는 경험을 축적해 온 지역이다.
이 사실은 한국과 중앙아시아 협력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공유문화유산은 선언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며, 중앙아시아는 그 실천을 국제무대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양측의 협력 역시 일방적 지원이나 단발성 교류를 넘어 공동 연구·보존·활용의 구조 속에서 설계될 필요가 있다. 실크로드 유산의 본질이 국경을 넘는 연속성에 있는 만큼, 협력 또한 국경을 넘어야 한다.
한–중앙아시아 문화유산 협력의 현실과 과제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문화유산 협력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 한국 정부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통해 키르기즈공화국에서 전통공예를 기반으로 한 문화관광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전통 보존을 넘어 지역 장인의 역량을 강화하고, 전통공예를 관광·시장·교육과 연계해 지역경제 활성화로 연결하려는 시도다. 또한 실크로드의 대표 도시인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는 사마르칸트 고고학연구소의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지역 문화유산의 관광자원화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문화유산을 보존의 대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활용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접근이다.
한국에 설립된 유네스코 C2센터인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 역시 중앙아시아와의 공유유산 협력 분야를 꾸준히 발굴해 왔다. 나우르즈와 같은 다국가 명절, 전통활쏘기, 세계유목민축제 등은 공동 교류와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전통활쏘기 등의 문화유산은 유목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을 잇는 상징적 요소로, 양 지역 간 무형유산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는 분야다. 아울러 중앙아시아 내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포함한 이주 공동체 연구는 양측의 역사적 연결성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중요한 협력 분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실크로드 리빙 헤리티지 네트워크’와 같은 협력 플랫폼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실크로드를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 살아 있는 문화적 실천으로 바라보고, 이를 지역 간 협력의 기제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그럼에도 과제는 남아 있다. 많은 협력이 프로젝트 단위에 머물러 장기적 축적 구조가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유산 협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공동 조사–기록–보존–활용의 체계를 상시화하고, 디지털 아카이빙과 데이터 공유를 통해 지식 기반을 확장해야 한다. 인력 양성과 현장 역량 강화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 중앙아시아가 무형유산 공동등재를 통해 보여준 협력 경험은 이러한 구조적 협력을 설계하는 데 유리한 토대가 된다.
2026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 제도화의 전환점이 되어야
2026년 9월 예정된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는 이러한 논의를 제도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다. 문화유산 협력이 선언적 문구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중장기 전략과 로드맵 수립, 보존을 넘어 현대적 활용과 연계된 협력사업의 발굴과 이행, 효과적인 협력 거버넌스 구축, 전문기관 및 전문가 간 연구 네트워크 강화, 인적 교류 확대 등 구체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ODA 사업, 공동연구, 디지털 플랫폼 구축, 디아스포라 연구, 협력 네트워크 운영을 하나의 전략 틀 안에 묶는다면 협력은 단편적 사업을 넘어 종합적 파트너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아울러 국내 기반의 강화도 필요하다. 한–중앙아시아 협력이 일회성 사업이나 외교 일정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중앙아시아와 문화유산 분야를 포괄하는 전문적 협력을 지원할 상설적 기반이 요구된다. 현재 관련 연구기관, 문화기관, 대학, ODA 수행기관, 민간단체 등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통합적 네트워크는 충분히 구축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한–중앙아협력포럼사무국의 기능과 조직을 확대·강화하여, 정책 대화를 넘어 문화유산을 포함한 사회·문화 분야의 실질적 협력을 연계하는 허브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외교적 선언을 넘어 문화유산 협력을 제도화한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할 국내 협력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
문화유산은 외교의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기반이다. 아프로시압 벽화 속 신라 사신이 보여주듯 우리는 이미 천여 년 전 같은 문명 네트워크 안에 있었다. 중앙아시아가 독립 이후 공유유산 협력을 제도화해 온 경험, 한국이 축적해 온 문화유산 보존·활용 역량, 그리고 디지털 기술이 결합한다면 실크로드는 과거의 유적이 아니라 미래의 협력 지도가 될 수 있다. 실크로드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연결의 경험’이다. 이제 그 경험을 오늘의 정책으로, 내일의 제도로 바꾸어야 한다. 문화유산을 공동의 자산으로 다루는 순간 협력은 지원과 수혜의 구도를 넘어 상호 기여와 공동 책임의 구조로 전환된다. 문화유산을 통해 관계를 설계할 때,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과거를 공유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회문화적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를 함께 만드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끝.
※ 본 칼럼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의 기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필자의 개인 의견을 포함하고 있으며, KF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