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앙아 ICT 협력, 교실에서 시작하는 미래
국민대학교 윤종영 교수
들어가며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 간의 ICT 협력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인프라 구축과 시스템 도입에 집중해 왔지만, 이제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진정한 디지털 협력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나는 최근 개최된 한-중앙아 ICT 분야 정책토론회에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그 답을 중앙아시아의 교실에서 찾고자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초중고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ICT 교육에서 협력의 다음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협력의 성과와 한계
한-중앙아 ICT 협력은 지난 십여 년간 꾸준한 성과를 거두어왔다. 카자흐스탄의 전자정부 정책자문과 공무원 연수를 통한 역량강화 협력, 우즈베키스탄의 KOICA와 EDCF를 통한 통신 인프라 고도화 지원 및 ICT 인재양성,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의 정보접근센터 운영과 디지털 역량강화 협력 등이 몇 가지 사례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ICT 역량 향상과 디지털 전환 기반 마련에 상당 부분 기여하여 왔다.
하지만 동시에 구조적인 한계도 드러났다. 첫째, 도입된 시스템을 운영하고 발전시킬 현지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 둘째, 대부분의 협력이 정부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에 집중되어 일반 국민의 디지털 역량 향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셋째,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다 보니 지속가능한 기술 자립 기반이 취약했다. 결국 고급 기술을 도입해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고 발전시킬 인재가 부족하면, 외부 의존도만 높아지고 진정한 기술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교육이 답이다: 왜 초중고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정책토론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논의는 "인프라보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더 오래 간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ICT 협력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즉시 가시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하드웨어 중심 접근에서 벗어나, 장기적 관점에서 인재 양성에 투자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협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초중고 교육 단계부터 ICT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는 단순한 도구 사용법이 아닌 컴퓨팅 사고력과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 둘째, 어린 시절의 교육 경험은 진로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므로, ICT 분야의 잠재적 인재를 조기에 발굴하고 육성할 수 있다. 셋째, 모든 학생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계층 간, 지역 간 디지털 격차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한국의 경험을 돌아보면, 1990년대부터 시작된 정보화 교육의 확산, 그리고 2000년대에 활성화된 ICT 활용 교육이 디지털 인재 양성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고 오늘날 K-ICT 발전에 기여한 주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중앙아시아 각국의 교육 환경과 문화적 특성에 맞게 적용한다면, 10년 후 중앙아시아의 디지털 혁신을 이끌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단계별 교육 협력 로드맵
구체적인 협력 방안으로 3단계 로드맵을 제안한다.
- 1단계: 기반 조성 (1-3년)
각국별로 30-50개 시범학교를 선정해 디지털 리터러시와 코딩 기초를 정규 교육과정에 통합한다. 핵심은 현지 교사 역량 강화다. 연간 500명 내외의 교사를 대상으로 60시간 이상의 집중 연수를 제공하되,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한 혼합형 방식으로 운영한다. 교육 자료는 각국의 언어와 문화적 맥락을 반영해 공동 개발하고, 오픈소스 방식으로 공유해 지속적인 개선이 가능하도록 한다.
- 2단계: 확산과 심화 (4-6년)
시범학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 단위로 확산한다. 특히 농촌과 오지 학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이동형 ICT 교육 랩을 운영하고, 학교 간 원격 공동수업을 상설화한다. 여학생의 ICT 분야 참여를 높이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IT 기업과 연계한 멘토링 체계를 구축한다. 또한 직업계 고등학교와 연계해 실무형 ICT 교육 과정을 개발해 취업으로 직결될 수 있는 기술 교육을 제공한다.
- 3단계: 자립과 혁신 (7-10년)
교육받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시점에 한-중앙아 공동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고등학교-대학 연계 트랙을 통해 국제 해커톤과 캡스톤 프로젝트를 정례화하고, 현지 문제 해결을 위한 ICT 솔루션 개발에 집중한다. 장학 프로그램은 단순 유학이 아닌 '귀환형'으로 설계해, 교육받은 인재들이 모국으로 돌아가 후배들을 가르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핵심 협력 프로그램
이러한 로드맵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프로그램으로 다음을 제안한다.
- 한-중앙아 디지털 교실 프로젝트는 5-9학년을 대상으로 연령별 맞춤 교육 모듈을 제공한다. 디지털 시민성부터 시작해 블록 코딩, 파이썬 기초, AI 리터러시까지 단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수업은 현지 교사가 주도하되, 한국 교사가 코치로 참여하는 협력 교수법을 통해 자연스러운 기술 이전이 이뤄지도록 한다.
- 교사 아카데미는 정보·수학·과학 교사뿐 아니라 모든 교과 교사를 대상으로 한다. ICT는 더 이상 특정 과목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학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현장 기반의 전문성 개발 모델을 도입해 수업 관찰, 피드백, 동료 학습을 통한 지속적인 역량 향상을 지원한다.
- 이동형 ICT 랩은 학교 밀도가 낮은 지역의 교육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순회형 교육 차량과 지역별 허브 학교를 연계해, 모든 학생이 고품질의 ICT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도록 한다.
실행 전략과 지속가능성
성공적인 실행을 위해서는 거버넌스와 재원 조달 방안이 중요하다. 한-중앙아 교육협력위원회를 구성해 양국의 교육부, 디지털 관련 부처, 지방정부, 그리고 현장 교육자들이 함께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한다. 재원은 양국 정부 예산에 더해 다자개발은행, 국제기구, 민간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결합한 블렌디드 파이낸싱 방식으로 조달한다.
성과 평가는 단기 지표(교사 연수 이수율, 참여 학교 수)와 중장기 지표(학생들의 STEM 분야 진학률, 지역 간 교육 격차 변화)를 균형 있게 설정한다. 무엇보다 현지 교원양성대학과의 연계를 통해 사업 종료 후에도 교육과정과 연수 체계가 각국의 교육 시스템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래를 향한 투자
교육을 통한 ICT 협력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 효과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하다. 이미 다수의 유사 사업이 존재하나, 본 제안은 이를 통합·혁신·내재화하여 교육 생태계 전반의 질적 도약과 지속가능한 현지화를 목표로 한다.
오늘 초등학교에서 코딩을 배운 학생이 10년 후에는 자국의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들이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문화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유대감은 향후 경제협력과 문화교류의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교육 협력은 일방적 지원이 아닌 상호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은 한국의 ICT 교육에도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으며, 진정한 동반성장의 모델을 만들어갈 수 있다.
맺으며
진정한 ICT 협력의 시작은 교실에 있다. 오늘 심은 교육의 씨앗이 내일의 디지털 혁신을 이끌 인재로 성장할 것이고, 이들이 바로 한-중앙아 협력의 미래를 책임질 주역이 될 것이다.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보다 작은 교실에서 시작하는 교육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지속가능한 협력의 토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초중고 학생들에게 양질의 ICT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실질적인 협력의 첫 단계라는 믿음으로, 교육 중심의 새로운 협력 모델을 함께 만들어가기를 제안한다.